‘봄날은 간다’는 언제 들어도 좋다. 그러나 새정치민주연합 유승희 최고위원의 ‘봄날은 간다’는 한 편의 공포 영화 같았다. 막말 폭언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그걸 말리는 난장의 한가운데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목소리, 그 처연한 가락이라니.

새정치민주연합 유승희 의원이 지난해 9월 당시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소장파 긴급 의원단 모임을 마친 후 취재지의 질문을 받고 있다.


그런 부조화를 영화 <블루 벨벳>에서 느낀 적이 있다. 성적 학대가 펼쳐지는 장면을 바비 빈튼의 발라드 ‘블루 벨벳’이 비단결처럼 부드럽게 감싼다. 시각과 청각의 충돌, 그 어긋남에 매우 심란했다. 기이한 것과 익숙한 것, 역겨운 것과 사랑스러운 것이 동거할 수 있다는 사실에 속이 불편했다. 폭력과 섹스, 정신착란이 뒤섞인 장면에서 로이 오비슨의 감미로운 노래 ‘인 드림스’가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하게 흐르며 귓불을 간질이는 몽환적 분위기도 감성에 교란을 일으켰다. <지옥의 묵시록>을 볼 때도 그랬다. 미군이 헬기 부대로 베트남 어촌을 공습하는 유명한 장면이 있다. 헬기 부대가 화면을 가득 채우며 끔찍한 살육전을 예고하는 긴장된 순간, 바그너의 ‘발퀴레의 기행’이 장엄하게 울려 퍼진다. 광기와 비극이 영웅적 서사처럼 묘사된 것이다. <시계태엽오렌지>도 청소년 폭력배들이 춤추고 노래하며 성폭행하는 장면을, 떠들썩하게 즐기는 한바탕 축제로 만들었다. 그 상황에서 폭력배 대장이 흥얼거리는 노래가 진 켈리의 ‘사랑은 비를 타고’다.

이런 불쾌감에도 세 영화가 폭력과 범죄를 조장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폭력을 과장된 스펙터클로 드러내는, 흔한 영화적 방법이 오히려 더 폭력에 대한 무감각을 드러낸다. 폭력은 쉽게 목격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것, 예외적 현상이란 인식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그런 폭력은 도처에 존재하는 폭력을 부정하는 폭력이다. 그보다는 아름다운 음악과 폭력의 결합이 빚는 괴기스러움이 오히려 폭력의 본질을 더 잘 드러낸다. 감미로운 노래 때문에 더 선명해진 폭력이 폭력을 폭력적이게 한다. 친숙한 것과 섞이고 일상에 스며들어 은폐되고 있어도 드러나고야 마는, 폭력에 내재한 감춰지지 않는 혐오감이야말로 폭력을 제대로 고발한다.

그래서 음악은 무죄다. 나는 여전히 블루 벨벳, 발퀴레의 기행을 즐긴다. 유승희에도 불구하고 봄날은 간다 역시 계속 불릴 것이다. 천양희 시인이 계간 ‘시인세계’(2004년 봄)에 산 제비 날던 고향 절골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쓴 글이 있다. 봄 소풍 때 선생님의 요청에 그 노래를 구성지게 불렀는데 예쁜 선생님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무슨 슬픈 사연이 있었을까 생각하다 시집간 언니를 떠올렸다. 언니는 사랑하던 사람과 맺지 못하고 중매결혼을 했다. 언니는 친정 올 때마다 뒷동산 성황당과 암자를 찾았다. 성황당 돌탑에 돌을 올려놓고는 무언가를 빌었다. 그리고 암자로 가는 고갯길을 넘어갈 때 언니의 분홍치마가 바람에 휘날렸다. 앞서 가던 언니는 나지막이 봄날은 간다를 부르며 울고 있었다. 이런 추억은 한국인 누구나 공유하는 감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의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노래를 부른다는 건 한국인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몇 해 전 인사동 한 선술집에서 선물로 받은 CD 두 장에는 서른세 개의 봄날은 간다가 담겨 있다. 가수도, 음색도, 리듬도, 장르도, 녹음한 시대도 다른 서른세 곡을 다시 들어본다. 체념한 듯 스산한 목소리의 한영애가 뿜어내는 데카당스. 슬픔을 자극하는 조용필의 비음(鼻音)이 격발하는 주체할 수 없는 한(恨). 너무 섬세해 상처받을 것 같은 심수봉의 여린 가슴 저 밑바닥에서 울리는 작은 떨림의 물결. 남성다움의 과잉으로 아픈 가슴을 감추는 배호의 그 잘난 허세. 깊은 사연을 가슴에 묻고 있는 것 같은 굵은 목소리와 가녀린 정서가 혼성을 이루는 문주란의 미묘함. 사라지는 것에 대한 장사익의 처절한 절규.

하나의 노래가 서른세 개의 노래로 변주되는 동안 우리들의 삶도 그와 같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삶은 다 다르지만 알뜰한 맹세에, 실없는 기약에, 얄궂은 노래에 봄날이 가듯 어떤 인생도 흘러간다. 누구의 봄도 머물지 않는다. 열아홉 시절이 황혼 속에 슬퍼지는 건 황혼이 되어서야 열아홉이 절정이었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 사라질 때 아름다움을 생각하고, 봄이 왔을 때가 아니라 봄이 갈 때 봄을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왜 떠나고, 소중한 것들은 왜 사라지고 마는가? 봄날은 간다는 그 상실을 목 놓아 부르지 않는다. 삶은 봄이 아니라, 봄이 가는 것을 아는 것이고, 그걸 노래할 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모래가 손 안에서 빠져나가는 것과 같은 소멸과정이다. 그러나 소멸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지혜와 성찰을 남긴다. 고은의 ‘그 꽃’은 이렇게 노래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이대근 논설위원


Posted by 경향 이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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