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측면에서 정치는 정글을 닮았다. 여기서는 누구나 사자가 된다. 살려면 남의 먹이라도 낚아채야 한다. 양보는 없다. 먹이를 먼저 차지했다고 그걸 자기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된다. 먹이를 지킬 힘이 없으면 내 것이 아니다. 권력도 권력을 유지할 능력이 있을 때까지만 내 것이다. 요즘 새정치민주연합이 정글정치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전·현 당대표가 “실패했다” “당치 않은 이야기”라고 치고받는다. 신당 추진 인사와 당대표는 “너나 잘해라” “무례하다”고 공방전을 벌인다. 원내대표가 당대표를 흔들고, 총무본부장은 원내대표를 해임하겠다고 맞선다. 혁신위원장이 전 당대표를, 전 당대표가 혁신위원회를 공격한다. 비주류가 혁신위를, 혁신위가 비주류를 비판하고 당대표와 최고위원이, 최고위원과 최고위원이 충돌한다. 이걸 파벌정치라고 부른다면 파벌정치를 모욕하는 일이다. 파벌정치는 정상적인 정치 과정이다. 이건 그냥 집단 난투극이다.

이 장면을 지켜본 야당 지지자들은 분노에 지쳐 이제 한숨만 내쉰다. 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위안이 될지 모르겠다. 정치는 본래 허락받고 싸우는 공간이다. 일정한 규칙만 지키면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을 마음껏 펼치도록 갈등을 제도화한 무대다. 만일 그들이 권력 다툼을 하지 않으면 시민들끼리 직접 목숨 걸고 싸워야 한다. 40년 전쯤에는 의견이 다르면 잡아서 고문했다. 70년 전에는 맞서는 상대를 암살로 제거했다. 수백년 전에는 이긴 쪽이 진 쪽을 전부 살해했다. 수천년 전에는 가족·이웃 간 사소한 일에도 살인하는 게 일상이었다. 인류 역사에서 살인은 분쟁 해결의 손쉬운 수단이었다. 다행히 우리는 정치인 덕에 서로 죽이지 않고도 안전하게 살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의원(오른쪽)과 안철수 전 공동대표가 악수하고 있다._연합뉴스



문 재인·안철수·천정배·김상곤·이종걸·조국은 모두 신사다. 이 점잖은 이들이 싸웠다면 그럴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바꿔먹으면 마음이 좀 너그러워지지 않을까? 물론 그래도 남는 의문이 있다. 왜 신사들이 갑자기 서로 뒤엉킨 채 기성 정치인도 흉내내기 어려운, 비신사적 언어로 사생결단의 대결전을 펼친 것일까? 초선급 정치 경륜이라 그런 것일지 모른다. 더 강한 신념과 자부심을 가진 이들이 그렇듯 타협과 양보에 서툴러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여당이 아닌, 야당에서 두드러진 현상이다. 야당에는 아무리 신사라도 어떤 지위와 역할이 주어지고 약간의 차이라는 조건을 부여하기만 하면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상태로 빠져들게 만드는 어떤 구조가 있는 게 틀림없다. 그게 뭘까?

니 컬러스 크리스태키스와 제임스 파울러는 비만 조사에서 뚱뚱한 사람은 친구, 형제 자매, 배우자도 뚱뚱한 편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가까운 사람의 식습관이 비슷하면 그럴 수 있을 것이므로 특별한 발견 같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뚱뚱해진 시점을 주목하면 다르다. 사람들은 친구와 가족이 뚱뚱해진 이후에 뚱뚱해졌다. 비만이 전염된 것이다. 이는 집단선택 이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주변에 협력적인 사람이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쳐 집단 전체가 협력적으로 변하고 그 결과 집단은 번성한다. 이때는 이기적 유전자도 협력을 택한다. 생존력을 높여주는 협력은 곧 이기적 결과를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여기에선 모두 신사가 될 수 있다. 이게 새누리당의 방식이다.

반대로 이기적인 사람이 많으면 그반대로 이기적인 사람이 많으면 그 주변도 영향을 받아 이기적인 사람이 다수를 차지하는 집단이 된다. 이런 집단에서 협력은 생존에 불리한 전략이 된다. 그러므로 협력은 줄고, 이기적 행동은 늘며 집단은 무너진다. 여기에 신사는 없다. 모두 사자다. 사자는 두려운 게 없다. 지지자도, 선거 패배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정치연합이 처한 현실이다.

이런 야당이 자살친화적 성장이라는 폭주 기관차를 멈춰 세울 수 있다고 기대할 수는 없다. 야당이 퍼뜨리는 이 비관주의는 이미 사회를 감염시키고 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죽이는 대신 자신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먹고살기 어려우면 집단의 규모를 줄이는 게 자연의 법칙이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먹이에 비해 개체수가 많으면 집단 자살로 개체수를 줄여 생존을 도모하는 사례가 있다. 야당 역시 주변 환경에 비해 의원 129명은 과잉이라고 판단하고 총선 절벽에서 집단 자살을 기도하는 것 같다. 물론 개별적으로는 살아나려 애쓴다. 안은 문을 차버리고, 문은 안을 내쳐서 이기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개인적 합리성은 집단 전체로서는 집단 생존을 위협하는 비합리적 결과를 낳는다.

야당의 신사는 감염되는 수동적 존재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이기적 집단을 협력적 집단으로 감염시킬 능력이 있다. 그들의 선택에 달렸다. 협력인가, 자살인가?


이대근 논설주간



Posted by 경향 이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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