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대학에 다닐 때 학교 수업에 흥미를 잃은 버니 샌더스는 도서관 지하 서고에 파묻혀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주로 제퍼슨, 링컨, 뎁스, 마르크스, 트로츠키, 프로이트의 책을 읽었다. 청년 사회주의 동맹 활동도 했다. 대학을 나와서는 반전 운동을 했다. 이른바 운동권이다. 그 때문에 1981년 벌링턴 시장에 당선됐을 때 “벌링턴 인민공화국이 탄생했다”고 떠들썩했다. 그래도 그는 그때나 지금이나 사회주의자를 자처한다.

그러나 한국의 야당 정치인은 웬만하면 운동권 경력을 내세우지 않는다. 누굴 운동권이라고 부르는 건 어느새 혐오 표현이 됐기 때문이다. 흑백논리, 배타성, 과격성은 물론 ‘싸가지’ 없는 태도도 운동권 문화로 간주된다. 야당은 운동권 낙인을 벗어나야 했고, 그 때문에 타협적으로 처신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돌아온 것은 운동권 탈피의 격려와 지지가 아니라, 박근혜 정권의 폭주를 제어하지 못한 무능 정당이라는 새로운 낙인이다.

구호는 외치되 실천하지 않고, 주장은 하되 이룬 것이 없으면 구호와 주장만 눈에 띈다.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끼는 것이다. 야당이 서민의 삶을 개선시키는 일을 한 게 있다면 깃발만 있을리 없다. 샌더스는 사회주의 정체성을 한 번도 포기하거나 감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미국 시민은 샌더스에게서 사회주의를 보지 않는다. 샌더스가 벌링턴 시장 때 한 노인이 지역 신문에 편지를 썼다. “나는 사회주의가 뭔지 모르지만 샌더스가 도로 정비만큼은 제대로 합디다.” 적어도 그의 지역 버몬트에서는 “먹고사는 문제에 관한 한 버니는 우리 편”이라고 인식한다. 그래서 낙태·동성결혼을 옹호하는 샌더스 입장을 반대하면서도 그를 지지하는 보수성향의 인물들이 상당히 많다.

그는 보통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주장하고 실천했다. 그게 샌더스가 말하는 사회주의이고 벌링턴 시장으로서 한 일이다. 부자를 위한 콘도 계획을 취소하고 공영개발하거나, 토지신탁기금을 세워 저가 주택을 공급했다. 대형 마트 입점을 거부하고 소비자협동조합을 결성, 소상인의 상권을 보호했다. 이 모두 시류의 순풍을 타고 한 게 아니라 1980년대 거센 신자유주의 역풍을 이겨내며 해낸 일이다. 그리고 기어코 벌링턴시를 미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고, 버몬트주를 공화당의 백년 아성에서 진보의 요새로 바꿔 놓았다. 나라를 바꾸겠다는 한국 야당은 지방자치 20년 역사에서 작은 도시도 바꾼 적이 없다. 적어도 지방정부는 기성 질서를 따르는 보수 정권이다.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연설을 하고 있다._연합뉴스


청년 실업 문제는 한국 총선의 주요 의제다. 여야 모두 청년 맞춤 공약을 내고 청년 정치인을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청년의 반응이 없다. 그런데 샌더스는 무엇을 했기에 록 스타처럼 젊은이의 열광적 지지를 끌어냈을까. 청년 공약이 아니다. 그거라면 다른 후보자들도 할 수 있다. 부의 편중, 사회보장 확대, 소득 불평등 문제를 바로잡지 않은 채 청춘콘서트처럼 하는 이벤트 정치로는 청년 문제를 풀 수 없다. 그걸 누구보다 청년들이 잘 안다. 사회 불평등 해소는 그가 평생 추구한 가치였고 일상적으로 실천하던 것들이다. 청년들이 왜 그의 진지함을 모르겠는가.

청년이 샌더스에 공감하는 다른 이유가 있다면 샌더스 자신이 청년이기 때문이다. 샌더스는 대통령이 된다면 역사상 최고령이 되지만 누구도 그의 나이를 따지지 않는다. 서른 살 시장 후보 첫 라디오 토론 때 너무 긴장한 그는 다리를 떨었다. 그 때문에 무릎 위의 탁자가 들썩거리는 소리가 방송을 탔다. 방송사에 전화가 빗발쳤다. “그 친구, 누굽니까.” 그는 그 떨림과 꿈을 여전히 간직한 청년이다. 청년의 열정이 아니면 칠순을 앞둔 5년 전 의사당에서 8시간37분간 감세반대 연설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야당이 청년의 정치 참여에 불을 댕기고 싶다면, 필요한 것은 딱 하나 사회를 역동적으로 바꿀 비전이다.

당연히 그 비전은 일회용, 선거용이어선 안된다. 샌더스는 미국을 바꾸겠다며 정치에 뛰어든 30대 때부터 일관된 주장을 했다. 그 때문에 그의 토론 때 사회자나 상대 후보자는 또 그 이야기냐며 미치려고 한다. 샌더스를 선택한다는 건 안전한 일이다. 그가 무얼 하고 무얼 하지 않을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야당을 선택하는 건 모험을 하겠다는 의미다. 야당은 선거 하나 치르면 당 지도부만 교체하는 게 아니다. 노선 수정이니, 정책 변화니, 인물을 바꾸니, 당명을 바꾸니 하며 혁신 쇄신 변신을 거듭하며 정체를 알 수 없게 만든다. 항상 새롭게 출발한다는 야당,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다.

불평등에 시달린 2016년의 미국인 에게 다행스럽게 언제든지 쓸 수 있는 도구가 있다. 44년 준비한 샌더스다. 헬조선을 탈출하려는 한국인의 옆에는 지금 누가 있는가.



이대근 논설주간


Posted by 경향 이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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