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계획과 통제하에서 인간이 필요로 하는 일을 대신해주는 것을 약한 인공지능이라고 한다. 알파고가 좋은 예다. 반면 인간과 같은 자의식을 갖되 인간보다 더 똑똑해진 존재를 강한 인공지능이라고 한다.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더민주가 계획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영입된 인물이다. 약한 인공지능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는 짧은 시간 딥 러닝을 통해 자신에게 임무를 맡긴 존재를 넘어서고 있다. 스스로 세운 계획에 따라 더민주를 통제한다. 다 계산한 것처럼 한 수 한 수 두는 그의 행마에 모두 쩔쩔맨다. 당 정체성도 바꿀 기세다. 김종인이 당의 일을 하는 것인지, 당이 김종인의 일을 하는 것인지 혼란스럽다면, 당신은 지금 인간과 인공지능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한국 정치에 관한 한 인공지능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김종인이 인공지능처럼 할 수는 있지만, 인공지능이 김종인처럼 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고용정보원이 최근 인공지능이 대체하기 쉬운 직업의 순위를 매겼는데 정치인은 빠져 있다. 정치인을 포함시켰다면 화가·조각가와 같이 대체될 위험이 가장 낮은 직업 1위에 올랐을 것이다. 한국 정치는 계산할 수 없다. 한국 정치인, 대체 불가다.

게임을 하려면 규칙이 있어야 하고 게임 참가자가 확정되어야 한다. 목적 달성을 위해 최적의 선택을 한다는 합리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게임의 상대도 분명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 정치에는 게임의 규칙이 없다. 어느 당의 공천방식은 오픈프라이머리에서 당원 대 국민 3 대 7 비율로, 다시 100% 여론조사로 시시각각 바뀌었다. 이조차 그대로 적용하지 않았다. 다른 기준이 있는 것 같은데 뭔지 알려진 바 없다. 아무도 손댈 수 없게 했다는 어느 당의 시스템 공천은 새로 당권을 쥔 이의 말 한마디로 무너졌다.

게임의 참가자도 정해지지 않았다. 후보 등록을 마쳤다 해서 모두 후보가 되는 것이 아니다. 후보 단일화가 남아 있다. 공천배제했다고 발표해도 조금만 기다리면 그 결정이 뒤집히는 걸 목격할 수 있다. 뒤집히지 않을 때는 무소속으로 나가면 된다. 선수 교체도 빈번하다. 후보가 두 야당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여야를 넘나드는 것도 다 가능하다. 게임 참가자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은근히 개입하는 대통령이 그렇다. 당이 선거를 앞두고 2개, 3개, 4개로 분화하다 다시 3개, 2개로 줄어든다. 한국 정치에서는 하나를 하나로 계산하면 안된다.



국민의당 이태규 "당 차원의 야권연대는 없다"_연합뉴스


게임의 상대는 명확하지 않다. 여야가 서로를 겨냥하지만 각자 내부의 적과 싸우는 데 더 집중한다. 비박이 친박을, 야당이 야당을 견제한다. 그래서 게임의 주체가 당인지 파벌인지 애매하다. 한 야당은 정권이 아닌, 다른 야당을 표적으로 삼고 있다. 선거가 야당 지위 인정 투쟁의 장이 된 것이다.

의외성, 변칙성, 비일관성은 물론 고도의 창의성까지 갖춘 한국 정치를 인공지능이 계산해 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인간에게 어려운 일은 인공지능에 쉽고, 인공지능에 어려운 일은 인간에게 쉽다는 모라벡의 역설이 있다. 인간의 직감은 쉽게 결론을 낸다. 새누리당의 승리. 미국 정치학자 애덤 셰보르스키는 경쟁 결과의 불확실성을 제도화한 것이 민주주의라고 했다. 그런데 이런 불확실성 속에 특정 세력의 승리라는 같은 결과가 반복된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이걸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불확실성이라는 게임의 규칙 안에서 발생하는 일이다. 민주주의의 질이 나쁘다고 할 수 있지만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야당은 선거에 참여해야 한다. 그게 유일하게 허용된 게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선거 국면이 열리면 야당은 마치 결과를 모르는 게임에 참여한 듯 행동한다. 상대의 허점과 실수가 두드러질수록 더욱 그렇다. 선거는 여러 가능성을 다 품은 것처럼 착각된다. 누군가가 정교하게 짜놓은 시뮬레이션 같다. 실제로 그렇게 믿는 이들이 있다. 무당파, 정치 무관심층이다. 선거는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 시뮬레이션의 비밀을 눈치챈 이들이다. 그래서 유권자의 절반을 차지하는 이들은 선거에 불참한다. 그들의 예측은 정확하다. 절반이 정치를 떠나 있는데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건 자명한 일이다.

그걸 이렇게 뒤집어서 말할 수도 있다. 그들이 참여하면 시뮬레이션이 무너진다. 소수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항상 이기는 게임을 바꿀 수 있다. 게임의 참가자가 많을수록 불확실성의 수준이 매우 높아지기 때문이다.

결과는? 당연히 알 수 없다. 대신 다양한 가능성이 열린다. 이런 민주주의, 어떤가?



이대근 논설주간


Posted by 경향 이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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